글: 김대연 형제(한국 교회 역사 고문)
삽화: 김정현 자매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의 산자락에는 망우역사문화공원이 있다. 이곳에는 1950~1960대 한국 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여러 인물들이 영면하고 있다. 그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가 한국 땅에 자리 잡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김호직 박사도 있다.
8월 31일은 김호직 박사의 기일이다. 망우리에 얽힌 김호직 박사의 생애 마지막 기록을 살펴보며, 그의 헌신을 기리는 시간을 보내본다.
1. 들어가는 말
이 글의 시작은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7번지에 관한 조사에서 비롯되었다. 한국 선교부가 있던 그 땅의 유래를 조사하던 중, 유홍준 교수의『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 서울편 4, 강북과 강남편』에서 망우리 부분에 눈길이 닿았다.[1] 이 장소는 김호직 박사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김호직 박사는 한국에 우리 교회가 뿌리내리는 데 많은 역할을 한 인물이다. 올해는 신앙의 개척자였던 김호직 박사가 세상을 떠난 지 65년이 되는 해이다. 그의 업적을 기리며, 망우리에 얽힌 김호직 박사의 생애 마지막 순간들을 되짚어 보자.
2. 김호직 박사의 예기치 않은 죽음
“당연히 [망우리 묘지]에는 무수한 망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대부분은 평범한 인물의 주검들이지만 때로는 책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죽음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무차별적으로 달려드는 게 죽음이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모른다. 죽음을 경험한 사람이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2]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대한민국 사회의 움직임을 전하는 주요 일간지였다. 아래는 1959년 8월 29일부터 김호직 박사에 관해 게재된 일련의 기사들이다.
►“회의도중 졸도, 김호직 박사 중태
전 문교부 차관이며 현 서울농대 교수인 서울시 교육위원회 부의장 김호직 박사는 28일 하오 교육위원회 회의실에서 「시내3개 국민학교의 교실 증축기성비 인준」문제를 토의하던 도중 하오 5시반 경 「뇌일혈」로 졸도하였다.
김박사는 즉시 시내 연세대학교 부속병원에 입원가료 중이나 29일 정오까지 혼수상태에 빠져 있어 매우 중태라고 한다.”[3]
►“김 교육위원 졸도
서울시 교육위원 김호직 씨는 28일 하오 6시반경 시교육위원 회의석상에서 회의진행 중 뇌일혈로 졸도하였다. 김박사는 즉시 「세부란스」병원에 입원가료 중에 있다.”[4]
동아일보는 발병 다음 날, 한 차례 더 상황을 전하는 기사를 실었다.
►“『의식』 미회복-졸도한 김호직 박사
서울시 교육위원회의 도중 「뇌일혈」로 졸도하여 방금 연세대학교 부속병원에 입원 중인 김호직 박사는 입원한지 사흘만인 30일 정오 현재 아직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5]
►“김호직 박사 31일 별세
속보=서울시 교육위원 김호직 박사는 31일 아침 9시반 연세대학교 부속병원에서 뇌일혈로 별세하였다. 향년은 50세이고 김박사는 전 문교부차관을 거쳐 건국대학 축산대학장 • 서울시교육위원인데 지난 28일 하오 6시반경 위원들끼리의 간담회석상에서 졸도하여 입원가료했던 것이다.[6]
그리고 김박사의 유가족은 부인과 2남2녀가 있다. 한편 김박사의 장의는 서울시 교육위원회와 건국대학교 및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등 공동주최 아래 교육위원회 의장인 서울시장을 위원장으로 건국대학교 분교(낙원동)에서 아침 10시에 영결식을 하기로 되었는데 장지는 망우리로 결정되었다. (사진은 고 김박사)”[7]
►“김호직씨 영면
28일 하오 서울시 교육위 회의 도중 뇌일혈로 졸도하여 세브란스 병원서 입원 가료 중이던 김호직씨는 31일 상오 9시반 별세하였다. 이학박사인 씨는 서울시교위와 건대축산대학장을 겸하고 있었으며 평북출시으로 향년55세, 장의식은 서울시 교위와
건대 공동으로 집행될 것인데 일자는 미정 (사진=고 김박사)”[1]
3. 당시 교회의 급박한 상황
주요 일간지에 활자로 적힌 기사는 정적이고 평면적이었으나, 이제 막 발걸음을 내디딘 교회의 입장에서는 폭풍의 시작과 다름없었다.
당시 관리 선교사였던 엘 에드워드 브라운 형제는 이렇게 회고한다.
“김정숙 자매님(주: 김호직 박사의 장녀)이 삼청동 선교사 숙소 창문을 황급히 두드렸습니다. 그때가 1959년 8월 29일 새벽 2시 30분경이었습니다.
김 자매님은 황급한 모습으로 부친이 병원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젠킨스 장로와 저는 서둘러 옷을 입고 김 자매님을 따라 급히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김 박사님은 장기간 인도에서 업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과중한 업무에 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 바로 전까지도 서울시 교육위원회 부위원장 자격으로 서울시 교육위원회 모임에 참여하셔서 다른 위원들과 함께 활발한 토론을 하셨습니다. …
우리는 병실에 들어서면서 그분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곧바로 신권을 행사했습니다. 우리가 축복을 하고 나서 우리는 김호직 박사님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고향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아주 특별한 영의 느낌을 받았습니다. …
축복을 하고 난 즉시 김 형제는 조금 증세가 나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하킨스 장로와 저, 그리고 여러 명의 교회 회원들과 가족들이 다음날 밤까지 꼬박 김 장로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8월 30일 오전 8시 하킨스 장로와 저는 삼청동 숙소로 와서 4시간 정도 잠을 자고 일어나 목욕을 하고 다시 병원으로 갔습니다. 김 박사는 조금 나아지는 기미를 보이는 듯 했지만 이내 의식을 되찾지 못하셨습니다. 고귀한 지도자를 지켜보면서 이 조그만 그룹의 회원들은 계속하여 그분의 회복을 열망했습니다. 우리들은 3일째 밤을 병원에서 보냈습니다.
8월 31일 아침 저와 하킨스 장로는 김 박사님의 건강이 호전되었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숙소를 향해 떠났습니다. 우리가 막 잠이 들었을 때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말을 들었습니다. 김호직 박사님이 오전 9시 30분에 별세하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우리의 훌륭한 김박사께서 주님의 팔에 안기셨습니다.”[1]
4. 장례 준비
김 박사의 사망 이후 장례식에 대해 조선일보는 시울시 교육위원회, 건국대학교,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공동 주관으로 보도하는 반면 동아일보는 교육위원회와 건국대학교의 공동 주관으로 보도한다. 당시의 기록 사진과 증언을 종합하면 조선일보의 기사 대로 교육위원회, 건국대학교,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가 함께 장례식을 주관한 것으로 보인다.
브라운 장로는 한국에서 봉사하는 선교사들의 관리 장로였다. 김호직 박사의 사망 당일 브라운 장로는 장례식에 대해 상의하기 위해 정부 관리를 만나러 서울 시청으로 갔다. 정부 관리는 브라운 장로를 예수 그리스도 교회 대표자로서 일단의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브라운 장로는 구겨지고 빨지도 못한 셔츠를 입은 어린 청년에 불과한 자신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몹시 궁금해했다.
이에 관해 브라운 형제는 이렇게 증언한다.
“도지사를 역임한 김 박사님의 처남이 장례식이 교회의 방식에 따라 진행되도록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서울 시장이 교육위원회의 대표자격으로서 장례위원회 위원장에 그리고 저는 부위원장에 지명되었습니다. 박 지사는 그의 자동차와 운전기사를 내주어서 저는 삼청동 숙소로 갔습니다. … 김호직 박사님의 두 따님은 그러한 시련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렸지만 위대한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2]
그는 장례위원회 부위원장으로 겪은 경험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장례식을 치르는 날까지 많은 새롭고 흥미있는 훌륭한 경험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높은 지위의 사람들과 명성있는 훌륭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
우리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김 박사님을 높이 존경하고 있었고 그 뿐만 아니라 김 박사님이 아는 사람들은 모두 개인적으로 교회 모임에 참석하도록 초대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 이 놀라우신 분은 용기와 겸손의 위대한 모범이었습니다.”[3]
[1] 『내 양을 먹이라, 김호직 박사의 생애와 업적』, 150~152쪽
[2] 『내 양을 먹이라, 김호직 박사의 생애와 업적』, 153쪽
[3] 『내 양을 먹이라, 김호직 박사의 생애와 업적』, 153~154쪽
[1] 동아일보, “김호직씨 영면”, 1959년 8월 31일자, 3면
[1] “대한민국의 미술평론가이자 미술사학자 유홍준이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본, 중국 등지의 문화유산을 답사하며 관련된 다양한 인문학적 지식을 소개하고 현대적인 의의를 설명한 기행문이다. 1993년에 출판된 1권 ‘남도답사 일번지’는 대한민국의 인문 도서 최초로 판매부수 백만 부를 돌파하며 전국적인 답사 열풍을 몰고 왔으며[1] 주요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에 60주 연속 오르며 독서계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위키백과,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 “망우리 사잇길에서 읽는 인문학, 그와 나 사이를 걷다”, 김영식, 401쪽, 망우리론, 최창조
[3] 동아일보, 1959년 8월 29일자 3면
[4] 조선일보, “김 교육위원 졸도”, 1959년 8월 29일자, 3면
[5] 동아일보, “의식미회복, 졸도한 김호직 박사”, 1959년 8월 30일자, 3면
[6]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김 박시의 나이를 각각 50세, 55세로 전하나, 1905년 출생이니 55세가 맞다
[7] 조선일보, “김호직 박사 31일 별세”, 1959년 8월 31일자,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