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보도

‘가평의 기적’ 제70주년: ‘후기의 힐라맨과 이천 용사’를 영원히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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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유타 주 방위군)2021 by Intellectual Reserve, Inc.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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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5월 26일, 한국 전쟁 당시 전략적 요충지였던 경기도 가평에서 미국 유타주 시더시에 본부를 둔 제213야전포병대대(이하 213대대) 장병 240명은 4,000명의 중국인민지원군과 16 대 1로 맞서 싸워 승리했다. 이들은 남부 유타 출신의 청년들로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충실한 회원이었다. 적군 350명이 사망하고 830명이 포로로 잡혔으나, 213대대의 장병들은 단 한 명도 사망하지 않았기에, 이 전투를 ‘가평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가평의 기적’ 70주년을 맞이하여, ‘힐라맨의 이천 용사’에 비할 수 있는 이들의 기적적인 승리를 다시 조명해본다.  

남부 유타의 평범한 후기 성도 청년들, 한국 전쟁에 나서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몇몇 요충지를 공격하고 서울을 향해 남하하면서 한반도에 전쟁이 벌어졌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미군을 유엔 연합군의 군사 작전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1950년 8월 3일, 유타주 방위군 제213야전포병대대(213대대)가 한반도에서 연합군을 지원하기 위해 연방군과 함께 투입되었으며 주로 한국군 보병부대의 화력지원을 담당하였다. 

유타주 시더시에 본부를 둔 213대대의 지휘관은 프랭크 댈리 중령이었으며, 600명의 병사를 지휘했다. 병사들은 17~23세의 평범한 대학생, 교육자, 농부 등이었으며, 모두 남부 유타에서 성장한 형제, 친척 및 친구들이었다. 또한 이들은 충실한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회원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베테랑 군인이었던 댈리는 전쟁의 혹독함을 겪어본 적 없는 젊은 병사들의 안전과 복리를 책임졌다. 

213대대는 1951년 1월 4일부터 워싱턴주 포트루이스에서 3주간 포병 훈련을 받았다. 같은 달 26일,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미 해군 함정에 승선했으며, 2월 16일에 한국 부산에 상륙했다. 이후 몇 달 동안 전진, 철수, 전투를 반복하며 민첩한 대응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213대대 240명, 중공군 4,000명에 맞서다 

1951년 5월 26일, 경기도 가평 지역에서 중공군의 대대적인 춘계공세가 감행되던 무렵, 213대대 600명의 임무는 적에게 진격하는 제24보병사단 21보병연대를 대포로 지원하는 것이었다. 작전 지역은 가평군 북면 화악리(당시 홍적리)였다. 213대대는 총 다섯 포병대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본부 포병대와 에이블 포병대 240명은 좁은 계곡 언저리에 진을 쳤으며, 나머지 서비스, 베이커 및 찰리 포대는 후방에 진을 쳤다. 

그날 저녁, 213대대는 예상치 못한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된다. 213대대가 지원하던 한국군이 사전 통지를 못한 채 후퇴한 것이었다. 미군 보병부대는 중공군 4,000명을 포위하기 위하여 전진 이동했는데, 미군의 공격을 받은 중공군이 포위망을 벗어나기 위해 유일한 탈출구인 계곡 입구를 통해 본부 포대와 에이블 포대가 지키는 진지로 진격해 왔다. 그리하여 보병의 엄호 없이 고립된 두 포대의 병사 240명은 약 17배에 달하는 4,000명의 중공군과 맞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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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유타 주 방위군)2021 by Intellectual Reserve, Inc.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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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리 중령은 즉각 자신이 책임진 병사들의 안전을 생각했다. “저는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했고, 우리의 안전은 우리 창조주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분명해졌고, 모든 병사는 침착하고 재빠르게 일련의 지시를 따랐습니다."  

지대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무기를 잡고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본부 포대의 웨슬리 채드번 병장은 이렇게 말했다. “어디를 둘러봐도 사방에 중공군이 있었습니다.” 본부 포대의 로버트 오스본 병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어딜 보더라도 누군가가 참호 속에 있거나, 덤불 뒤에 숨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105mm 곡사포의 원거리 사격이 쏟아졌으며, 신관을 0.5초로 설정하고 포탄이 땅에 닿기 전 공중에서 터지도록 하여 적진에 거대한 구멍을 뚫었다. 50구경 중기관총과 반자동 소총 등 모든 무기가 동시에 사용되었다. 중공군의 소총과 자동 권총의 총알 역시 그들 주변으로 쏟아졌다. 병사 엘모 로빈슨은 "불꽃이 하늘을 밝혔습니다. 두려웠어요. 총열이 녹을 때까지 50구경 기관총을 계속 발사했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중공군이 계곡을 돌파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밀고 나오자, 본부 및 에이블 포대원들은 격렬한 백병전까지 벌였다. 백병전을 벌인 병사들이 물러서지 않은 덕분에 베이커, 찰리 포대는 멀리 있는 보병을 지원하기 위한 포격 임무를 계속할 수 있었으며, 서비스 포대는 전투가 밤새 이어지는 동안 필수 보급품과 탄약을 계속 전달했다. 

단 한 명의 전사자도 없는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다 

동이 트고 전투가 잠시 뜸해졌을 때, 에이블 포대의 지휘관 레이 콕스 대위는 18명의 병사와 곡사포 한 대, 기관총 세 정으로 전투정찰대를 편성하여 계곡을 올라갔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중공군을 사살했다. 공격을 이어가던 본부포대의 고든 판스워스는 한 작은 계곡 쪽으로 나갔으며, 그곳에서 중공군 수백 명과 마주쳤다. 그는 “여기서 내가 죽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중공군 병사들이 총을 내려놓고 항복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단 한발의 사격도 없이 판스워스와 다른 병사 한 명은 계곡에 있던 중공군 98명을 생포했다.  

밤사이에, 제24해병보병사단은 포병을 지원하기 위해 전차 3대를 계곡으로 올려보냈으며, 가파른 주변 산비탈로 퇴각하는 중공군 수백 명을 포격함으로써 후퇴를 저지했다. 결국 수백 병의 중공군은 두 손을 들고 항복했다. 

병사들은 포로들의 몸을 수색하여 무장 해제하고, 전투에서 획득한 두 트럭 분량의 총기류를 파괴했다. 군인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이었던 이들은 시간을 내어 중공군 전사자들을 정중히 매장했다. 이를 본 중공군 포로들은 감사를 표했다. 중공군들은 240명의 병사로 이루어진 대대에 어떻게 무참히 패했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포로들은 이렇게 답했다. “그들을 쐈지만, 그들은 쓰러지지 않았다.” 

5월 26일부터 27일, 이틀에 걸친 전투에서 사망한 중공군은 350명이었으며, 붙잡힌 포로는 850명에 달했다. 그러나 213대대원 중에서는 소수의 부상자만 있을 뿐, 사망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전투는 가평 지역에서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를 막아내고 더 이상의 대공세를 취하지 못하게 하는 데 중요한 공을 세웠다.병사들은 한반도에서 여러 전선으로 이동하며 그들의 임무를 계속해 나갔고 11월에는 대부분 귀환했다. 213대대는 한국 전쟁에 참전한 미국의 19개 포병대대 중, 유일하게 한 명의 전사자도 없이 전원이 무사 귀환한 대대이기도 하다. 같은 해 12월, 트루먼 대통령은 부대 표창을 수여했다. 

‘후기의 힐라맨과 이천 용사’: 프랭크 댈리 중령과 213대대 

단 한 명의 전사자도 없이 기적의 승리를 거둔 213대대의 이야기는 몰몬경 앨마서에 나오는 힐라맨과 이천 용사를 연상케 한다. 젊은 후기 성도 군인들에게 ‘한국’이란, 이전에 들어본 적 없는 머나먼 타국이었지만, 한국의 ‘자유를 위해’ 기꺼이 전쟁터로 향했다. (앨마서 53:17) 이들은 힐라맨의 이천 용사처럼 심히 ‘용맹스러[웠으며], 무엇이든지 그 맡은 일에 항상 충실[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 정직하게 행[하였다]’고 알려진다. (앨마서 53:20~21)   

포트루이스 포병 훈련 당시, 이들은 성실하게 훈련에 임했으며, 배운 바에 따라 정확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특히, 벙커 폭파 장치로 약 5km 떨어진 벙커의 입구를 맞힐 정도로 포격 정확도가 높아 전투력 테스트에서 ‘우수한 실력’으로 평가받았다. 이에 당초 한국으로 파병된 다른 포병대대를 대체하기 위해 독일로 배치될 예정이었으나, 한국 전쟁터로 실전 배치되도록 변경되었다.  

에이블 포대 글렌 오그덴은 213대대원들의 탁월한 전투능력과 하늘의 보호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적군은 우리와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조직이나 지시, 훈련도 없었습니다. 반면 우리 대대는 훈련이 잘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병사들은 맡은 일에 뛰어났고, 모든 것이 몇 번이고 연습한 것처럼 진행되었습니다. 총알이 사방에서 날아왔습니다. 주님이 그곳에 없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240명이 4,000명의 군대를 무찌르고 한 명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한편, 몰몬경 속 이천 용사들의 앞에는 힐라맨이 있었듯이, 후기 성도 병사들의 선봉에는 프랭크 댈리 중령이 있었다. 당시 한 부대원이 쓴 글은 댈리 중령의 남다른 헌신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는 훌륭한 리더였으며, 우리 모두를 염려해주었다. 몸무게 85kg에 갈색 머리였던 그는 일 년이 지나자 67kg에 백발이 되었다. 그는 그에게 맡겨진 대대의 부대원 600명의 책임자였고, 우리 600명 전원은 가족과 친구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충실한 후기 성도였으며, 아버지가 ‘아들들’을 돌보는 심정으로 대대의 복리와 안전을 책임졌다. (앨마서 56:10) 댈리 중령 역시 남부 유타 출신으로, 자신이 맡은 병사들의 가족을 알고 있었다. 만약 이들 중 한 명이라도 잃을 경우,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 가족들의 얼굴을 차마 마주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기도에 힘쓰며 대대의 안전을 간절히 구할 수밖에 없었다. 

“1951년 한국 전쟁 당시, 저는 포병대대의 사령관으로서 즉각 병사들을 이끌고 공산군과의 전투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제 고향이나 근처 지역사회 출신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늘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믿었고 기도의 힘을 믿었습니다.” 

댈리 중령은 혼란스러운 전쟁터 한가운데서 끊임없이 기도에 힘쓰며, 주님께 의지하는 모범을 보였다. 그는 매일 아침 그날의 활동을 계획하면서 혼자 시간을 내어 기도했으며, 기도하는 시간에는 천막 밖에 흰색 깃발을 꽂았고, 깃발이 있을 때는 비상 상황이 아니면 아무도 그를 방해하지 않도록 명했다. 그는 그 시간에 최고 사령관인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고 있다고 말했으며, 자신들을 지켜줄 분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뿐이라고 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하늘로부터 영감을 받아 지시를 내렸고, 병사들은 이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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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몬경에는 싸워본 적이 없는 힐라맨의 2000명의 젊은 용사들이 막강한 레이맨인 군대와 싸워 승리하고, 같이 승전한 아군의 전사자가 천명이나 됨에도 이들은 한 명도 전사하지 않은 경이로운 기적이 있었다. ‘의심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건지[신다]’는 몰몬경의 약속은 수 천 년의 시간을 넘어 후기 성도 청년들 위에 그대로 주어졌다. (앨마서 56:47) 213대대가 조국의 부름을 받아 출병하기 전, 유타주 세인트 조지 성전의 성전장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예언적인 축복을 받았다. "여러분이 성전 성약대로 의롭고 도덕적인 생활을 하면 생명을 잃지 않고 모두 무사 귀환할 것입니다." 후기 성도 군인들은 성전 성약에 충실했으며, ‘기적적인 힘’으로 싸우는 동안, 축복이 이들 위에 함께했다. 결국 ‘한 명도 땅에 쓰러[지지 않고]’, 출병한 600명 모두가 무사 귀환함으로써 이 예언적 축복은 온전히 성취되었다. (앨마 56:56) 

240명의 작은 대대가 4,000명의 적군에 맞서 거둔 완전한 승리는 세계 전쟁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기적이다. 이는 수천 년 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기적이 이 후기에도 똑같이 실재한다는 증거이자, 하나님과 맺은 성약에 충실할 때 보호받는다는 원리의 입증이다. 70년 전, 240명의 후기 성도 청년들은 ‘하나님이 계시고, 의심하지 않는 자는 그의 기이하신 권능으로 보전되리라는 것을 심히 굳건히 믿[고]’ 큰 도전에 직면하여 기적을 일궈냈다. (앨마서 57:26) 이들은 ‘기적은 그쳤다’고 말하는 세상 속에 살아가는 이 세대의 청년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나아갈 때, 놀라운 기적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미군 참전 및 ‘가평의 기적’ 제70주년 기념 행사, 미 유타주 참전 용사들을 기리다

한국 서울 선교부, “가평의 기적” 전투 기념비 현장에서 봉사 활동 ‘구슬땀’

[출처: 중앙일보] 미군 600명이 중공군 4000명 물리친 기적의 가평 전투

미군 한국전쟁 참전 및 가평전투 70주년 기념행사

경기도 가평 가볼만한 곳 : 미국 참전비에 깃든 한국전쟁의 영웅들

Public Broadcasting Station(PBS): “Miracle at Kapyong: The Story of the 213th”

바로 이 땅에 실재했던 기적의 역사와 ‘후기의 힐라맨과 이천 용사들’의 숭고한 정신은 후손들의 가슴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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